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성 전투 (문단 편집) ==== 부대 수습과 제22연대 수색중대의 독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8102310583782000 (2).jpg|width=100%]]}}} || 군단 작명 제5호에 의거한 제3사단은 사단작명 제61호로써 제18연대와 제22, 23연대도 똑같이 철수시켜 중공군의 추가공격을 대비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상 사단작명대로 성공적으로 철수한 연대는 백골연대라고 불리던 제18연대 단 하나뿐이었고 제22, 23연대는 여전히 분산 상태로써 남아 저지 진지조차 인수하지 못하니 만약 중공군이 여기서 공세를 한번 더 가했으면 사단은 완전돌파는 물론 사단자체가 소멸될 것이 뻔하였다. 특히 제3사단과 제11포병대대의 전투상보에서 밝힌대로 당시 보병부대의 무질서한 철수는 질서규율은 물론 FO와의 통신자체를 두절시키게 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포병대대는 무려 20시까지 FO배치에 노력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고 기술하고 있을 정도로 당시 연대의 모랄빵 사태는 그야말로 다부동 전투때의 숲되미산 전투처럼 작전 자체를 무력화시켰다. >보병부대의 분산철수로 말미암아 FO와의 통신이 두절되었으며 대대는 20.00까지 FO에 배치에 힘을 썼으나 할수가 없었다. >---- >금성천지구전투, 제11포병대대 中 이러한 대혼란은 이날 22시까지 지속됐고 그때서야 분산 사태가 어느정도 수습되더니 사단CP를 사방거리에 이동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상황은 나아지는 듯 보였는데 이때 제22연대의 경우에는 사단작명 제61호를 수행하기 위하여 소성동을 지나던 도중 기습공격을 받아 분산되어 19시에 이를 다시 재수습한 뒤, 20시에는 적 포위망을 돌파한 제22연대 제2대대가 합류하여 병력 대부분을 복구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연대는 지속된 전투와 보급두절 및 철수로 인하여 각 장병들의 떨어진 사기를 채우기 위해 식량과 장비를 추진해 그동안의 잃었던 사기를 어느정도나마 충족시키게 하는등, 앞서 말한대로 상황은 문제는 있지만 점차 안정화되고 있었다. 한편 이 동안에도 중공군은 계속 공격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고 더군다나 사단은 예정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수 없었기 때문에 사단장 임선하 소장은 제22연대에게 현재 수습된 병력을 데리고 666고지-723고지간의 방어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구령으로써 하달하여 이에 따라 제22연대는 21시부터 행군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때 금성천 남안에서 집결하다가 중공군의 포격을 받아 분산된 제23연대는 병력을 재규합해 625고지 북안으로 가 그곳에서 재편성을 실시하도록 했고 이후 잠시나마 전투력을 끌어모으자 연대는 저지진지를 인수하기 위하여 제1대대를 먼저 출발시키도록 하였다. 그런데 행군도중 약 1개 중대규모의 중공군이 대대 앞에 출현했고 이어 대대와 교전을 벌임과 동시에 포탄도 발사하여 제1대대를 분산 직전으로 밀어 넣는다. 이에 제23연대장은 사단과의 연락을 취하려 했는데 문제는 당시 사단 연락망은 이미 두절된 상태였고 결국 연대장은 사단 연락망을 복구시키기 위해 저지진지 인수는 일단 후순위로 미루자는 판단을 내려 각 대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하였다. >1.연대는 동막동을 목표로 전진하려함. >2.제1대대는 좌일선으로서 851고지를 거쳐 직진하라. >3.제3대대는 중앙축선을 따라 682고지를 경유하여 직진하라. >4.제2대대는 우일선으로 596고지를 거쳐 전진하라. >5.수색중대는 현 위치에서 연대의 철수를 엄호하라. 먼저 제1대대는 17시 30분에 682고지를 거쳐 동막동에 집결했으며 제3대대는 19시 30분에 동막동으로 집결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제2대대는 별우로 우회하여 17번 도로를 따라 남진 해 23시에 동막동으로 도착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제2대대는 각 대대중에서 가장 느리게 동막동으로 도착했는데 그 원인은 당시 3개 사단이 17번 도로를 차지한채 철수를 진행하고 있었고 여기서 낀 제2대대는 꽉 막힌 17번 도로를 지났기 때문에 결국 23시가 되고서야 동막동으로 집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30 동막동에 집결중임 제2대대는 14.50 별우(CT851421)를 경우 22.00 백암동(CT843 388) 지점에 집결중임 연대 수색중대와 제3대대는 철수하여 수색중대는 1000(CT874437) 지점에 집결 후 12.50경에 434고지(CT867436) 지점에 배치하여 아방 철수를 엄호하며 적의 후속부와 1시간 교전투가 1400(CT861428) 지점으로 도하하여 다시 15.00경 소성동에 집결하여 적정을 파악하며 적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하여 재차 도강하여(CT871432) 지점에서 수불상의 적과 30분간 교전 후(CT856424) 지점으로 철수 재차 도강하여 16.30 파수리 (CT853418)에 집결하여 596고지(CT850405)에 배치한 후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고 있었음 20.30 연대CP는 사방거리에 위치함. >23.00(CT897 365) 지점에 배치중인 제2중대는(CT880 380) 지점으로 이동한 후 새로운 저지진지를 구성하여 방어에 임함. >23.40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철수한 제1중대 제6중대는 분산됨. >----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30p 한편, 연대의 철수를 엄호하게 된 제22연대 수색중대는 연대의 뒤를 따라 행군하던중 중공군들이 광대곡 앞에 있는 강을 도섭하는걸 목격하게 된다. 이는 명백히 연대 진지에 대한 공격시도였고 이에 중대장 김대위는 초근접한 상황에서 역습을 하겠다는 결심을 한채 중대원들을 언덕에 산개시킨 후, 숨을 죽여 대기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중공군의 주력이 도하하고 그중 일부 부대가 언덕에 발을 들이자 이때를 기하여 중대는 일제히 총을 난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중공군은 이를 피하지 못한채 피격당했고 살아남은 자는 혼비백산하여 도주함으로써 전투는 잠시동안 소강상태에 돌입하였다. 이때 중대장 김대위는 처음으로 중공군을 정면에서 공격해 격퇴했고 이와같은 전과를 올리자 이 기세를 몰아 교량을 건너 북안으로 역공격하여 중공군을 분쇄하기록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중대는 교량에 있는 중공군 시체를 뛰어넘어 북안으로 향하였으니 이 놀라운 행동에 중공군은 그 어떠한 주의도 돌리지 않았다. 이후, 중대가 북안으로 도달하자 중대장 김대위는 돌격이라는 소리를 외치며 전중대원들과 함께 총검돌격을 감행하였다. 이어,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는 중대원들을 본 중공군들은 마치 얼이 빠진듯 우왕좌앙하다가 중앙으로 돌입한 중대원들에게 살해당했고 시체 50구를 남긴채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이렇듯, 놀라울 정도의 전과를 세운 연대 수색중대는 이후, 북안을 남진한 뒤 금성천을 건너 17시에 599고지의 새 진지를 점령하고 동시에 경계에 임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